2004.04.21 MOVIEWEEK



<라이어>주진모, 행복한 구라쟁이의 귀환


<라이어>에서 주진모는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하며 부는 풍선껌처럼, 수습할 수 없는 거짓말을 걷잡을 수 없이 늘어 놓는 정만철 역을 맡았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무궁무진한 거짓말을 끝없이 뱉어내는 그의 모습에서 예전의 주진모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가. 간절한 소망과 우연한 기회의 엇갈림,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오늘이 될 미래. 군대 제대 후 막노동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도 보고, 도매업에 관심이 생겨 청계천에 가서 기계를 만져도 보고, 출판사 영업사원도 해 봤던 평범한 남자. 한때 공무원의 꿈을 안고 두달 동안 독서실에서 책만 보기도 했던 이 남자는 우연치 않은 기회로 전시회에 출품할 사진의 모델이 됐고, 그 사진을 본 광고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미팅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누구랑 미팅이요? 여자들이요?” “여긴 ○○ 프로덕션인데 광고 미팅 좀 하려고요.” 얼떨결에 광고 촬영을 마친 후 손에 들어온 100만 원에 ‘아… 이거 짭짤하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들이게 된 사람, 바로 주진모다. 1999년 <댄스 댄스>로 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그는 어느덧 일곱 번째 영화를 찍고 30대를 넘어서고 있다. 이제야 자신의 중심을 찾게 됐다는, 연기자로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라는 주진모를 만났다.

# 인터뷰 전날 <라이어>의 기자 시사회가 있었고 반응은 무척 좋았다. 주진모는 제작진과 술을 거나하게 걸쳤고, 오후 1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그의 얼굴엔 덜 깬 취기와 함께 작품에 대한 만족감이 오버랩 되고 있었다. 그의 주목을 끈 것은 기자의 MP3 녹음기.
이게 뭐예요? 전 이런 것들 잘 몰라요. 아날로그 식이죠. 디지털화 되는 것에 대해 생체 리듬이 거부를 해요. 핸드폰도 걸고 받는 기능만 있는 게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나에 몰입하면 그것만 바라보는 성격이거든요. 인터넷 하는 것보다는 책 읽는 게 좋아요. 요즘은 잘 안 읽지만. 책 읽을 때 빠지면 하루에 서너 권 씩 읽기도 하고, 편집증 같은 게 있어요. 낚시도 좋아해서 시즌 되면 한 달에 이틀 집에 들어가요. 한번 몰입하면 폭 빠져요. 배우라는 직업을 잘 선택한 것 같아요. 박카스 모델을 한 후 유인촌 선생님이 하시는 극단 유에 들어갔고, 주변의 멋진 선배들처럼 좋은 연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한번 마음먹으면 그것만 보고 달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는 그것만 생각했죠.

# 2001년 <와니와 준하>를 찍은 후 주진모에게는 3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발해> <방아쇠> <빅하우스 닷컴> 등 그가 함께 하려던 영화들이 연거푸 제작 중단이 됐고, 소속 매니지먼트도 바꿔야 했다. KBS 드라마 <고독>(표민수 연출, 노희경 극본)을 놓친 것도 3년 간의 공백 기간 동안이었다.
<고독>은 정말 출연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어요. 그 당시 제가 속했던 매니지먼트와 드라마 제작진끼리 말이 잘 안 통했나 봐요. 아쉽죠. 지금은 제가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매니지먼트로 바꿨죠. 생각해 보면 지난 3년이 약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생각하는 폭도 넓어지고 여유롭고 침착해졌어요. 책임감도 많이 느껴지고 일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었어요.

# 지난해 <때려!>(SBS)에서 이한새 역을 맡은 주진모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주진모가 진작 저랬어야 하지 않았나” “저렇게 귀엽고 인간적인 캐릭터가 잘 어울리는데 왜 이제까지 분위기 있는 역만 맡아온 걸까.”
김경형 감독님이 절 처음 보고 하신 말씀도 그랬어요. 저 또한 답답했던 부분이었죠. 대부분 이미지로만 가는 역할이었어요. 한번쯤 저도 다른 돌파구를 찾고 싶었지만, 전작들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비슷한 시나리오들이 들어왔어요. 전 제 색깔이 확고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양하게 가고 싶어요. 그게 연기자 아닌가요.

# <때려!>를 촬영하는 동안 주진모는 너무 바빴다. 매니저의 차에서 새우잠을 청한 뒤 다시 촬영을 하는 일상이 계속됐고, 그런 그의 앞에 시나리오는 쌓여갔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 역시 <때려!> 속 주진모의 눈빛에 반했고, 그에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의외였죠. <라이어>의 시나리오를 보고 ‘이 역할은 차승원이나 임창정 같은 배우들에게 가있을 텐데 왜 나한테 왔지?’싶었어요. 감독님과 미팅을 하면서 물었죠. 왜 저였냐고. 김 감독님이 그러시더군요. 그런 분들과 함께 하면 감독님의 몫이 없다고요. 저와 같이 해서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다고요. 김 감독님 전작이 워낙 괜찮고, 씨앤필름도 탄탄하고, 대중 앞에 영화로 오랜만에 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남달랐어요. 스크린으로는 3년 만이니까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요. 남자답고 멋있는 역할도 있었지만 새로운 면을 보여드리고 싶었죠.
# <라이어>는 인물 중심의 코미디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거짓말로 인물들은 모두 각자 다른 상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진모는 그 중심을 잡아야 했다.
차라리 <무사>처럼 몸이 힘든 게 낫지 머리가 아프니까 미치겠더라고요. 인물간의 관계 파악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은 부분 중 하나였어요. 예전에는 내 역할만 생각하면 됐지만, <라이어> 같은 경우는 상대 연기자의 분위기까지 받아들여야 했거든요. 어제 기자 시사로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는데 쑥스러우면서도 놀랐어요. ‘나한테도 저런 면이 있구나.’ 옛날에 연극 <라이어>는 본 적이 있지만, 이 영화 작업에 참여하고 난 뒤에는 일부러 연극을 안 봤어요. 연극을 보고 나면 잔상이 남고 따라하게 될까 봐서요. 연극과 바뀐 것들이 있죠. 신장원이나 만철과 상구가 옥신각신 하는 7:3, 6:4 같은 비율이요.

# 주진모의 상대역을 맡은 배우들은 공형진과 임현식, 손현주다. 자율적인 연기에 익숙한 베테랑 셋을 상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하지만 주진모는 날고 뛰는 개성파 배우들 사이에서 꿋꿋이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처음에는 웅크린 듯한 느낌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떤 틀에 갇힌 사람들과 연기했다면 저 또한 이렇게 풀어지지 못했을 거예요. 그분들이 벌려놓고 가니까 저 또한 여유로워졌죠. 배우들끼리 함께 상승세를 탔던 것 같아요. 배우들 간의 상승세가 없었다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을 뻔했어요. 시나리오를 보면 연극 대본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대로 갔으면 연극 무대를 카메라로 찍은 것밖에 안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거짓말하는 부분은 연극 톤으로 표현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리얼한 생활 연기를 했어요. 제 스스로가 너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면 정만철은 정말 나쁜 놈이 되잖아요. 연극적인 연기와 생활 연기를 믹스시키는 게 포인트였죠.

# <라이어>의 촬영 현장은 영화보다 더 웃긴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를 켜 놓고 고개를 돌리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너무 웃어서 누가 한번 웃으면 점심밥값 내기를 할 정도로 많이 웃었어요. 녹음하는 팀은 소리내면 안되잖아요. 심지어 녹음하는 애가 큭큭 거리고, 붐대 잡는 친구들도 고개 돌리고 있고. 형진이 형이 제 첫 번째 와이프 가슴 만지는 신에서는 너무 웃으니까 길게 찍은 다음에 안 웃은 부분만 커팅해서 집어 넣자고도 했어요. 현장이 좋으니 영화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죠. 3∼4년 전에 인터뷰한 것 중에서 제가 가장 하고 싶지만 아직 할 시기가 아니라고 했던 장르가 코미디라고 한 적이 있어요. 기존에 우리 나라에서 히트한 영화들이 대부분 코미디죠. 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많고, 보고 난 다음에 남는 게 없잖아요. <라이어>는 화려한 것들을 빼고 무척 절제했어요. 인물 간의 관계로 관객의 재미를 자극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죠.

# 대개 한 두 달 정도 예상보다 촬영 기간이 길어지는 게 보통인 충무로의 관례에서 <라이어>는 한 발자국 벗어나 있다. 마치 할리우드나 일본의 영화 제작 시스템처럼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을 모두 마친 것. 39회 차의 촬영 스케줄을 단 한번도 어기지 않았던, 김경형 감독의 치밀한 프리 프로덕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중후반은 거의 세트 촬영이었죠. 한 달 반 동안 군대 생활하는 느낌이었어요. 항상 규칙적으로 아침 일곱 시에 기상해서 현장에 여덟 시 도착, 늦어도 밤 열 시 전에는 촬영을 끝냈거든요. 밤샘 촬영해서 지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어요. 영화에서 배우들이 지쳐 보이지 않고 계속 리듬을 탈 수 있었던 게 감독님이 그런 스케줄까지 조정했기 때문이에요. 집중력이 높아졌죠. 처음에는 김 감독님의 진면목을 몰라서 움츠려 있었던 것 같아요. 김 감독님은 배우들을 풀어놓는 듯하지만 모든 것을 다 컨트롤하는 똑똑한 분이세요. 배우를 확실히 믿고 가면서, 자기 계산은 철저하게 되어 있는 천재 같아요.

# 정만철은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남자다. 도덕적으로 정말 나쁜 놈이긴 하지만, 그런데 이 남자 왠지 귀엽다. 그 정만철이 되었던 주진모 역시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모습이다.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그가 발랄하게 껌을 씹고, 깔고 앉은 공이 미끄러진다며 즐거워하고 있으니.
실제로 양다리 걸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지금 있으면 혼나죠. 지금 사귀는 친구를 만나기 한참 전에 한번 정도 그랬어요. 그런데 그건 양다리라고 볼 수도 없는 게 제가 좋아하는 친구는 내 마음을 안 받아 주고, 날 만나 주는 여자는 있었고. 마음은 저기 가 있는데 몸은 여기 있고. 하하. 아주 어렸을 때죠. 정만철은 실질적으로 보면 못된 사람이죠. 이 못된 놈을 영화에서까지 못되게 표현한다면 누가 재미있게 보겠어요. 만철에 대한 키 포인트는 ‘재미있고 귀엽게 보이자’였어요. 굉장히 머리 아팠다니까요. 사실 지금도 만철이가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하루에 열 마디 이상 안 했는데, <라이어>하면서 표정도 밝아졌어요.

# 박지윤과 공동 주연을 맡은 한중합작 드라마 <비천무>를 위해 주진모는 중국으로 떠났다. 자신에 대한 솔직한 성찰은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열쇠다. 세탁은 했지만 다림질되지 않은, 닦긴 했지만 광 내지 않은, 자신감에 넘치지만 겸손한 모습. 주진모는 지금 행복하다.
예전에 받은 개런티에 비하면 2/3 밖에 받지 않았어요. 보통 개런티가 내려가지는 않잖아요. 제가 받은 개런티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라이어>를 통해 확실히 보여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이젠 제 중심을 확실히 잡고 가게 됐어요. 때문에 여유 있어지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죠. 이게 20대와 30대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극 중에서 만철이가 한 말처럼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아요. 지난 3년간 힘든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행복이죠. 여기서 더 행복해지려면 뭐가 있을까 싶을 정도예요. 이제 돈만 벌면 되지 않을까요? 후후.
최미현 기자 200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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