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으면 연기도 없다.” 배우 주진모는 진중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쌍화점>의 동성 간 사랑에 이 어 <무적자>에선 형제와의 사랑이다. 주진모는 정신없이 총을 난사하는 핏빛 누아르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먹고 사 는 멜로 배우다.
<쌍화점> 이후로 1년 반만이다.
아. 그런가? (촬영장이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자 조용! 여기 인터뷰합니다! 조용! (자세를 고쳐잡으며)합시다. 원래 성격이 이렇다. 군대 정신이 있어서.
<무적자> 촬영 때도 맡형으로서 이런 역할을 도맡았을 것 같다.
교 통정리 많이 했다. 남자 주인공만 하던 4명의 배우가 모였으니 보이지 않는 미묘한 공기 같은 게 있었지. 더군다나 나는 그중 맏형이고. 그렇다고 형 대접받겠다 하면 나머지 배우들은 속으로 불편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카메라에 그대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승헌이에게도, 강우에게도, 한선이에게도 다 똑같이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애들도 그런 마음을 알아줬고, 현장에서만큼은 서열이나 위계질서 같은 것들이 없었다.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다. 결과론적으로도 물론 좋은 거고.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해버린 셈이다.
겉모습은 이래 보여도 딱 부러지는 구석이 있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사람이거든. 한 가지 목표나 주제가 주어지면 그것만 보고 치고 달리니까. 잔머리 굴리고 이런 것도 없다.
연기하기 좋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일 수도 있겠네?
그 럼. 카메라 앞에 서는 배우들은 예민할 때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자기를 다 비워야 할 때도 있다. 바보가 되어야 할 때도 있는 거지. 연출자가 요구하는 걸 흡수해야 하는데 뭔가 다른 생각이 겹쳐버리면 그 결과가 스크린에 다 나오더라.
그런 점에선 이성 배우와의 촬영이 더 편하지 않나?
여 자 배우와 일하면서 편했던 적은 없다. 여배우와는 또 소통 자체가 틀리니까. 직접적으로 부딪힐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오해의 소지도 생긴다. 돌려서 얘기해야 하는 부분들이 생기면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지난 영화나, 이번 <무적자> 같은 경우는 남자들끼리만 하게 되니 사전에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에 대해 오픈하는 시간을 가진다. ‘난 이런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현장에서 오해의 소지가 생기지 않게끔 소통을 미리 하는 거지. 현장에서 육두문자가 오가도 그게 친근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는거다.
네 남자, 소통의 시간이 충분했나?
만 약 첫 촬영이 서울에서 진행됐다면 그런 부분이 조심스러웠을텐데 이번 경우는 태국이었다. 잠자기 직전까지 매일 배우들을 봐서 소통이 빨리 된 편이지. 사실 한선이 같은 경우는 그전에 나와 관련돼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주진모가 싫어하는 선배 중 하나였다더라. 데뷔할 즈음 캐스팅 과정에서 내가 조한선이 싫다 해서 자기가 잘렸다라는 식의 얘기를 들었다는 거다. 이번에 술 한잔 하면서 그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직접 하지도 않은 말이 괜한 핑계로 둔갑됐던 거였다. 이번 기회로 되레 더 가까워졌다.
남자들만의 세계란 참 흥미롭다. 서로에게 어떤 남자가 되느냐, 어떤 남자로 보이느냐가 가끔 먹고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누아르 영화에 대한 관심도 본능적이다.
그 런데 사실 난 <무적자>를 찍을 때부터 촬영하는 동안, 그리고 마칠 때까지 누아르 영화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영화는 멜로 영화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연기했다. 나라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으면 연기가 안 되는 사람인데. 이성간의 사랑, 동성간의 사랑도 다 해봤지만 이번엔 형제의 사랑, 의형제의 사랑이라는 것도 해봤다. 총격전, 액션 이런 건 멜로 드라마를 위한 효과적인 장치일 뿐이다. 영화를 보면 그렇게 느낄 거다.
배우가 연기하는 내내 그렇게 느꼈다면 작품 또한 그럴 거다.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다.
원작(<영웅본색>, 주진모는 제목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이라는 기준에 의해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감독님 역시 나와 많은 이들에게 ‘우리 영화는 남자의 멜로드라마’라고 했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영화에 대한 느낌을 제대로 전달 받았나?
음… 시나리오보다는 시나리오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변화된 부분이 많다. ‘혁’이라는 역할은 대사도 별로 없다. 마치 햄릿처럼 상황에 따른 갈등과, 상대방이 나에게 표출하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줘야 하는지에 대한 리액션이 중요하다. 감독님과 시나리오에서 보여주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얘길 많이 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표현을 했더라도 관객들과의 소통이 잘 안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감독님은 다른 캐릭터보다 ‘혁’ 역할을 길잡이 노릇으로 생각했다. 부담이었지.
대사가 진짜 별로 없나?
원 래는 많았다. ‘혁’이란 역할 자체가 어렵다 보니까 작가 분들이나 감독님이 처음엔 막 썼었다. 그런데 내가 연기를 하다 보니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걸 말로 또 하니까 설명적으로 되더라. 내가 먼저 대사 대신 눈빛으로만 해도 될 것 같다고 건의를 했다. 감독님이 오케이 해서 대사 신도 찍어보고, 내 감정대로만 푸는 신도 해봤다. 그런데 현장편집을 해보니까 내 생각이 맞더라. 관객들이 생각할 여지를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간 거였다. 한번 그러고 나니 감독님이 다음 신 찍을 때부터 대사를 다 없애.(웃음) “아니 감독님, 최소한 이 말은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해도 아니라고.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게 좋다”고 하시더라.
길잡이 노릇이라면 <쌍화점>의 왕 역할도 그렇다.
잘 난 척을 좀 하자면(웃음), 미묘한 감정들이 움직이면서 어떤 그래프가 그려지는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단선적인 캐릭터의 경우 단번에 튀게 표현하면 시각적으로는 확실히 어필하겠지만 남는 건 별로 없거든. 그런 캐릭터보다는 그냥 옆에 서서 가만히 있어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사람 있잖아. 영화를 보고 나면 ‘아 저 사람이 이래서 그랬었구나’라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캐릭터. 그게 좋다.
관객의 입장에선 때로 단선적인 캐릭터에 더 몰입될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주진모 씨가 선호하는 역할들이 더 인간적 면모를 풍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만 봐도 그렇지 않나? 희로애락이 한 가지 결로 표현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이런 캐릭터를 계속하다 보니 오히려 다른 캐릭터들이 다 보인다. 이런 부분에서 공부가 되는 거지. 언젠간 나도 나이스하게 관객들의 대리만족이 될 수 있는 그런 캐릭터를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아직까지 확 당기는 캐릭터가 없었기 때문에 숨기면서 표현하는 캐릭터를 더 찾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배우로서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모험을 걸게 되는 캐릭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배우 본인이 마음 가는 캐릭터를 신중하게 선택해서 그런지 관객 역시 주진모라는 배우가 맡은 캐릭터는 신뢰가 간다고들 한다.난 배우 생활 오래 할 거다. 머리가 희끗희끗하더라도 멜로를 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어느 한 순간에 빵 튀는 배우가 아니라 서서히 사람들을 흡수시키는 스펀지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 작품 작품마다 기둥이 될 수 있는 그런 배우로.
결국 배우는 몸이 재산이다.(웃음)그래서 요즘 관리 잘하고 있다. 식스 팩!!(웃음) 트위터에 사진 올려서 난리가 났었다. 그래서 요즘 다시 없애는 중이다. 너무 인위적으로 보이더라고.
어쨌든 대중으로서는 작품마다 변화하는 배우의 모습을 보는 게 흥미롭다. 다른 삶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랄까?그 재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배우들은 엄청난 내적 고통을 감수한다. 나 같은 경우 1년에 한 작품 정도만 하는데 그만큼 하는 동안에는 스트레스가 심하다. 사실 지금 이 머리 색이 진짜 내 머리 색이 아니다. 하도 새치가 많이 나서 염색한 거다. “마음 편하게 가지셔야 되요”라고 하지만 마음 편하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아닌데 뭘. 하루 하루를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되는 거니까. 그게 배우의 소명인 것 같다. 마음에 품는 걸 없애는 순간부터는 기계적으로 연기하는 거지. 그런 배우의 길을 가게 된다면 은퇴하고 싶다.
하지만 ‘수컷’의 이미지가 각인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누군가는 ‘제 2의 최민수 선배’처럼 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한다. 그런 건 아니다. 다음 작품이 아주 말랑말랑한 멜로가 된다 하면 완전히 또 바뀔 거다. 바뀔 자신도 있고. 마음의 준비도 다 되어 있다.
무릎팍 도사를 촬영한 것도 주진모의 변화 중 하나로 보인다.그거 10시간 가까이 녹화했다.
10시간?
다 른 이들도 이렇게 녹화하냐고 물으니 1년에 간혹 몇 사람들한테만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 얘기가 재밌으면 그렇다고. 심지어 강호동씨도 녹화 끝나고 “알기 전에는 몰랐는데 녹화 끝나니 진모씨가 달리 보인다” 하면서 악수를 청하더라. 사실 배우나 연예인들은 어느 정도 감추면서 보여주잖아. 근데 내가 뭣에 홀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 훌러덩 벗었다. 껍데기를 다 벗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 처음이었나?처음이었다. 방송 녹화가 아니라 성당에서 고해성사하는 그런 자리가 되더라 나한테는. 한 번도 방송에서 해본 적 없는 사적인 얘기를 다 끄집어냈다. 그러다 보니 울컥하기도 하고, 웃음도 나고.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더라.
낚시 즐기는 은둔형 인간이라 생각했다.너 무 은둔하니까 죽을 것 같더라. 미치는거야.(웃음) 이러다가 진짜 흔히들 말하는 ‘끝’까지 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요즘 의식적으로 많이 오픈을 하려고 한다. 사람들과도 어울리려고 하고, 대인관계도 좀 넓히려고 하고. 게다가 그나마 ‘절친’인 ‘장씨’(장동건)가 장가가버리는 바람에 어디에 전화할 데도 없고 소통할 데가 아무 데도 없더라고.
그래서 트위터를 시작한 거였나? 힘 들고 외로웠다. 어찌 보면 그게 유일한 소통의 도구다.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 가에 대해 주고받으니 마음의 문도 열릴 수 있더라. 그런데 점점 알려지다 보니 기사화가 되고, 그런 부분은 좀 아쉽다. 싸이월드도 폐쇄시켰는데 트위터도 하지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도 생기고.
트위터에 이런 멘션을 올렸더라. ‘가장 어려운 일 중 세 가지. 첫째는 명성을 얻는 것, 둘째는 생명 있는 동안 명성을 유지하는 것, 셋째는 죽은 뒤에도 명성을 보유하는 것. – 프란츠 하이든’ 주진모에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제 일 어려운 질문이다. 답을 못하겠다. 지금 많이 혼돈스러운 게 배우로서 가는 길은 보이고 있는데, 배우이기 이전에 나는 박진태라는 사람이거든. 박진태를 봤을 땐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 건가 그런 부분에서 많이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잘하고 있나? 정체되어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지. 고민 끝에 <무릎팍 도사> 제의를 수락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수 있다. 요즘은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
가둬두었던 무언가를 어떤 방법으로든 열고 싶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뭔가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쌍화점> 인터뷰에서 배우에게 가장 최고의 작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인생 마지막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럼 현재 최고의 작품은 가장 최근의 작품이 되는 건가?
아니. 다음 작품이다.
- 글 박은성
사진 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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